2. 아디스아바바의 인상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와 젊은 농학박사는 산책을 나갔다. 도시에 어둠이 들고 백열등이 길가에 점점이 켜지는 시간, 우리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고 바람은 시원했다.

한참을 걷고 있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우리 뒤엔 예닐곱살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 두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두 명의 아이들, 백열등아래 검은 천진한 얼굴과 하얀 이, 큰눈이 빛났다. 내가 지갑을 꺼내길 기다렸던 모양이다. 무심코 지갑을 꺼내려 하니 동행한 젊은 농학박사가 막았다. “돈을 주면 안됩니다. 돈은 어른들에게 뺏기고 아이들은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바나나를 사서 주자고 했다. 우리가 두 아이를 데리고 과일가게를 찾아가는 잠시 동안에 아이들은 8-9명으로 늘어났다.

우리는 충분한 바나나를 샀고,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호텔로 돌아왔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땐 나도 젊었고 이성이 감정을 이기기 힘든 나이였다. 호텔로 돌아온 나와 젊은 농학 박사는 깊은 밤까지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부질없는 감정과잉이 아니었던가 한다.

여정은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일행은 나와 한국에서 파견된 농학박사 한 분, 월드비젼의 현지 책임자 두 분과 운전수, 그렇게 다섯이었다. 그 분들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함을 용서해 달라. 지금은 “모세’라는 운전수의 이름만 기억이 난다.

아디스아바바에서 Yirgacheffe County까지는 4-5시간이 걸린 것으로 기억된다.

도시를 벗어나자 넓은 초원지대가 계속되었다. ‘아! 여기가 사바나구나’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2차선 도로를 따라 거의 직선으로 달려가는 길은 잘 닦여져 있었으나 차가 속도를 내지는 못하였다. 길 가 초원에서 동물들이 차를 향해 달려드는 일도 있고, 농민들이 길 위를 소나 염소를 몰고 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를 목격하기도 했다. 같이 간 현지 스탭이 말하길, 농민들은 자동차의 속도에 익숙하지 못해 무리하게 길을 건너다 사고를 당하는 일이 자주 있다고 한다.

우리는 AWASA의 어느 호숫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태양은 뜨거웠고, 꽃은 붉었다. 아름다웠고 어젯밤의 일로 무거운 마음도 풀렸다. 망각은 참 편리하다. 망각이 없었다면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옥일 것이다.

점심을 먹고 이디오피아의 식량부족문제에 대해 우린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우리가 가는 길 옆에 제법 큰 호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관계수로가 되어 있지 않아 농민들은 늘 가뭄에 시달린다고 했다. 어느 호수를 지나 갈 때 내가 큰 호수 옆에 비닐하우스가 보이는데 무엇을 기르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인도인들이 만든 비닐하우스로 그 안에선 유럽으로 수출하는 꽃을 기른다고 있다. 내가 비닐하우스엔 대형펌프가 있을 터인데, 물을 나눠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나눠주지 않는다고 물었다. 차 안엔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디오피아 사람들은 스스로를 ‘시바여왕의 자손’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아프리카정교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사람들은 매우 점잖으면서도 유쾌했다. 고유의 종교, 고유의 언어와 문자(암하릭)를 지키고 사는 사람으로서 자존감이 높아 보였다. 남자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여자들은 키가 컸다.

한 사람이 자존감을 지키고 살아가는데, 교육, 문화와 감정 등등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경제적인 조건을 뺄 수는 없다. ‘그들을 가난에 빠지게 한 건 무엇일까.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었일까’ 등등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부질없이… 나는 그때 내 한 몸도 지키기 힘든 상황이었다.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경제위기가 전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시기였던 것이다.

여하튼 이디오피아 남자들은 다정다감하다. 친절하지만 진중하다. 그들은 만날 때와 헤어질 때 그들 고유의 인사법으로 예의를 다했다. 오른손을 팔씨름하듯이 마주잡고 서로의 오른쪽 어깨를 맞대고 등을 두드린다. 그들과 인사할 때 나는 안도를 느꼈다.